감격과 회한 뒤섞인 한강다리 1백년 이야기

출처인 월간중앙에서 관련 글을 찾을 수 없어 예전 게시판에 옮긴 전문을 실른다.

템스강엔 타워브리지, 센강엔 퐁네프, 한강엔 성수대교가 있다?

한강은 아름답다. 그리고 도도하게 흐른다. 폭이 1천m가 넘는 넓은 물줄기를 도심 한복판에 갖고 있는 도시가 얼마나 될까. 그 한강 위에 지난 1백년 동안 20개 넘는 다리가 놓였다. 그들에게는 저마다 애환이 서려 있다. 그러나 한강의 다리들은 아름다운 한강을 제대로 살려 주고 있는가. 교통의 흐름을 제대로 이어 주고, 시민들의 편의를 높여주고 있는가. 다리 건설에 얽힌 감격과 회환의 우리 현대사를 되돌아본다.

1900년 7월 5일. 4년공사 끝에 한강철교가 개통됐다. 이 다리를 쳐다보는 선조들의 경외(敬畏)로운 눈빛이 선하다. 한강에 3천척짜리 긴 무지개가 걸렸으니…. 한편으로는 무척 신기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웠을 터다.

우마차가 아닌 철마가 달리는 다리를, 그것도 외국인이 건설한 다리를 보며 선조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혹시 이 다리가 나중에 서울, 나아가 우리 국토 개방의 단초가 됐음을 눈치챘을까. 여하튼 한강철교 개통은 서울 개방의 신호탄이었다.

개방과 신분차별 철폐 가져온 한강철교

한강철교에 먼저 손을 댄 사람은 미국인 제임스 모제(James R Morse)였다. 그는 1896년 3월29일 정부당국으로부터 한강교량부설권을 따냈고, 1년 후에는 역사적인 기공식도 가졌다. 그러나 1년반 후 부설권은 일본으로 넘어갔고, 결국 공사는 일본사람들이 마무리했다.

그리고 5년 후. 1905년 5월25일 서울역 앞에서는 경부선 철도 개통식이 열렸다. 당시 미국 앨런 영사의 축사 중 이목을 끌 만한 몇 대목을 보자.

“…한국에는 여러 계급과 당파가 있습니다만, 철도는 평등자임으로 상민도 양반도 귀함도 천함도 모두 한결같이 철도의 시간을 지키고 기관차가 통과할 때는 이를 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 철도는 정해진 시간에 따라 운행하는 것이므로 스스로 민중에게 시간을 엄수할 것을 가르치는 까닭에 이 점에 있어 철도는 한국사람에 대한 문명적 지도자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886년 2월 폐지된 ‘신분차별’은 20년이 지났어도 여전했다. 김의원(金儀遠·경원대 명예교수·전 총장) 교수는 “철도 탄생은 이같은 신분제도 타파를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한다. 양반이라고 기다려 주지 않고, 노비라 해서 승차를 거부하지도 않는 철도로 인해 한국의 계급구조는 무너졌고, 지배·피지배 계급의 격차가 줄었다는 얘기다.

다시 앨런 영사의 축사 내용. “오늘은 한국엔 정말 기억돼야 할 날입니다. 이제 한국은 도원경(桃園鏡) 속에서 헛되이 취생몽사할 때는 아닙니다. …후일 내가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젊잖게 차장을 향하여 ‘서울역에서 내려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 때가 오기를 갈망합니다.”

이들은 한강철교를 놓으며 훗날 구라파의 오리엔트 특급과 연결을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혹시 한·일간 해저터널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도버해협이 94년 2월2일 유로스타로 뚫리자 “이제 도버해협은 템스강, 센강보다 좁다. 영국에서는 프랑스의 애완견 냄새가, 프랑스에서는 영국 밀크티의 향기가 코를 찌른다”며 부러워하는 한 일본인 학자의 논문 발표를 듣고 기자는 전율마저 느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영업용 차량이 들어온 것은 1912년. 사람·차량을 위한 한강대교 건설도 착수됐다. 1917년 중앙 차도 폭 4.5m, 양쪽 보도 1.6m짜리 다리가 건설됐다. 야간 장식전등까지 갖춘 이 다리는 당시 서울의 명물이었고, 자살 방지를 위해 ‘일촌대기’(一寸待己)라는 팻말까지 있었다. 얼마 후 광나루에는 광진교가 생겨 충주를 거쳐 부산으로, 원주를 거쳐 강릉으로 가는 길목이 됐다. 서울은 이렇게 해서 속속 개방되기 시작했다.

6·25가 터지자 한강다리들은 ‘작전상 폭파’됐다. 전쟁 발발 3일만에 폭파된 한강인도교 다리 위에서는 무고한 시민이 수백명이나 죽었다. 뿐만 아니다. 다리가 끊겨 피난을 못가고 3개월 동안 숨어지낸 시민이 80%에 달했다. 이들에게 한강다리는 또다른 의미였다. 1·4후퇴 때는 한달 전부터 준비했는데도 시민들에게 한강 건너기는 말할 수 없는 고생이었다.

“유사시 모든 한강다리는 폭파된다”

우리나라 구조학계의 대부 황학주(黃鶴周) 연세대 명예교수는 지난달 대한토목학회 주최 ‘1999년 토목의 날 기념 세미나’에서 “80년대까지도 한강다리 전체 모습은 물론 구조적 특성 등을 학회지에도 발표할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80년대까지도 정부가 국방 차원에서 한강다리를 통제했다는 얘기다.

종전 후 한강다리들은 1차적으로 복구됐고, 경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순전히 우리 기술로 양화대교(구교)도 건설했다(1965년 1월).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일본에서 철판을 사다 싸고 평범한 다리를 하나 놓은 것이다. 말은 안해도 “인민군이 또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나”하며 가슴 속으로는 항상 노심초사하던 시민들이 얼마나 큰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까.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전쟁이 나면 양화대교는 군 작전용으로만 쓰게 돼 있었다.

제3한강교도 당초에는 안보(安保)를 이유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1965년 서울 인구는 3백50만명, 1백50만명이던 6·25 때도 다리가 2개였는데 아직도 다리는 그대로였다. 장관도, 국회의원도 모두 그게 걱정이었다.

이럴 때 서울시장 윤치영씨는 1966년 1월19일 제3한강교를 착공했다. 이 사실은 그러나 당시 신문에 한줄도 비치지 않았다. 수년에 걸쳐 서울개발사를 정리하고 있는 손정목(孫正睦)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이 다리가 나중에 그 유명한 말죽거리 신화를 일으킨 경부고속도로의 기점이 될 것을 안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몰랐고, 시장도 건설업자도 몰랐다. 어쩌다 그렇게 됐다”고 회상한다. 그냥 유사시 서울시민의 도강용 다리로 건설하기 시작한 다리가 정말 우연하게 국토 대동맥의 기점이 됐다는 설명이다.

이같은 손교수의 지적은 다리의 위치를 봐도 명백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고속도로 기점으로 약수동은 말도 안됐다. 고속도로를 시내까지 끌어들이는 진입로로 타워호텔 옆을 뚫어 동대문으로 연결한 것은 특히 박정희 대통령식은 아니었다고 봐야 한다.

70년대 들어 안보상황은 더욱 급박해졌다. 75년 4월 월남이 패망하고 동남아 여러 나라가 공산화됐다. 미국에서는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건 카터 대통령이 당선됐다. 결국 안보용 다리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때는 국가안보회의 등 회의가 열릴 때마다 ‘교량마다 일단 유사시에 교량을 폭파해 차단했다가 다시 복구하는 방안’ ‘해저터널을 뚫는 방안’ ‘고가도로에 폭약장치를 하는 방안’ ‘동 단위로 공원에 방공호를 파는 방안’ 등이 논의됐다. 76년 잠수교는 착공 10개월만에 건설된다. 폭파해도 금방 복구할 수 있게 경간(俓間)을 좁게 건설한 다리였다.

“10·26 후 박대통령이 재가했던 서류를 일제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우연하게 성수대교를 잠수교로 추진하던 서류를 봤습니다. 당시 구자춘시장이 발의했는데 김재규 당시 건설부장관이 굵은 사인펜으로 ‘부동의’라고 썼더군요. 또 하나의 잠수교가 탄생할 뻔한 것을 건설부가 제동을 건 셈이지요.” 김석기(당시 서울시 도로국 근무·성수대교 건설감독관) 중앙건설 전무의 술회다.

성수대교가 겔버(GERBER) 타입 트러스교로 설계된 것을 보고 당시 일부 전문가들은 “기발한 설계다. 안보개념을 잘 도입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트러스 상판 양쪽에 핀을 꽂아 이론적으로는 폭격을 받으면 그 부분만 떨어지게 설계 했다는 것. 그러나 이에 대해 당시 설계를 담당했던 기술자들은 “절대 안보개념을 도입한 설계는 아니다”라며 펄쩍 뛴다. 어찌됐든 성수대교는 통상 있는 교량타입은 아니었고, 이 때문에 전문가들의 의견은 지금도 엇갈리고 있다.

강남투기 도화선 구실 한 한남대교

1966년 4월 서울시에 불도저 시장이 부임했다. 무슨 일이든 시작했다 하면 미쳐버릴 정도로 몰두했던 김현옥(金玄玉) 시장은 그러나 강남개발에는 미온적이었다.

그는 우선 제3한강교 건설에 제동을 걸었다. 부임 전 두해 동안 매년 1억원씩 들이던 공사비를 68년에는 갑자기 1천만원으로 깎아 버린 것. 이에 또 다른 불도저(장기영 부총리)가 발끈했다. 서울시립대 손정목 명예교수는 “두 불도저가 공·사석에서 여러번 부닥쳤다. 장부총리는 김시장이 서울사람이 아니라서 그런다고 몰아세웠고, 김시장은 장부총리가 말죽거리에 땅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런다며 맞받아쳤다”고 술회했다. 대신 김시장은 여의도 개발에 몰두했고, 그를 위해 마포대교를 건설했다.

김시장의 뜻과는 상관없이 제3한강교(한남대교)는 경부고속도로 덕에 부랴부랴 69년 한햇동안 9억3천만원을 들이부어(?) 연말에 완공됐다. 그후부터 이 다리는 강남 개발의 촉매가 됐다.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강남 땅 9백37만평(여의도의 11배)을 영동구획정리지구로 지정하는 대대적인 개발사업이 태동한 것이다. 여기저기 투기 바람이 불었고,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강북 일대에는 백화점·고등학교·술집 등의 신설을 억제하는 ‘강북억제책’도 시행됐다. 76년에는 고속버스터미널도 강남으로 옮겨갔다. 시민들에게는 “강북보다 강남이 안전하다”는 6·25 때 피난심리까지 있었다.

반포·잠원·압구정·잠실로 이어지는 한강변 강남쪽에는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순식간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다리도 하나 둘 건설되기 시작했다. 잠실대교(72. 7)·영동대교(73. 11)·잠수교(76. 7)·천호대교(76. 7)·성수대교(79. 10)·성산대교(80. 6) 등이 비슷한 시기에 들어섰다. 다리 설계, 시공에 한 3년쯤 걸린다는 것을 고려하면 70년대 서울은 쉬지 않고 한강다리를 건설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다리와 아파트를 매개로 강남은 더욱 개발되기 시작했다. 6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30년간 계속돼온 아파트 가수요, 프리미엄이 한강다리 없이 가능했을까. 1963년에서 1979년까지 16년간 학동의 땅값은 1천3백33배가 올랐고, 압구정동은 8백75배, 신사동은 1천배가 올랐다. 같은 기간 중구 신당동, 용산구 후암동은 각각 25배 오르는 데 그쳤다.

/월간중앙, 음성직, 1999.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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